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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을 그리는 이유 - 첫 번째카테고리 없음 2023. 4. 4. 11:23
이유가 뭘까?
몇 주 동안 '처음'에 어울리는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를 그리고,
한글 획디자인을 다시 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특히 획디자인은 생각처럼
풀리지 않아서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지난주에 이용제 선생님께 획정리가
많이 됐다고, 진행해도 좋다는 말씀을 들어 지금은 마음이 조금 나아진 상태이다.
(그리고 현재는 열심히 획을 갈고 있다. 이 글은 2주 전에 쓴 글이다.
획에 대한 내용은 조만간 정리해서 공유할 예정이다.)
매주 예기치 못한 시련을 맞딱드리는 상황에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처음 글자를 그리기 시작한 이유를 곱씹어 보았다.
그래픽 디자이너인 내가 굳이 글자를 그리는 이유는 뭘까?
사실 장래에 서체 디자이너가 될 마음은 1도 없다.
그런데 왜 그리는 걸까?
이렇게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어려운 걸..
첫 번째 이유,
잘 될 거 같아서.
근거 없는 생각일 수도 있는데, 직관적으로 잘 배워두면
잘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잘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오랫동안 디자인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자료 조사를 습관처럼 하다 보니
디자인 작업을 많이 보았지만, 한글로고는 잘 그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디자이너는 많지만 한글을 잘 다루는 디자이너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게 되면 경쟁력이 있을 거란 들었다.
그래서 2, 3년 정도 레터링을 했는데, 레터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활자를 그려야 레터링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한글 타이포그래피 학교에서 이용제 선생님의 활자 수업을 듣게 됐다.
UI, UX 쪽에 관심이 없어서 서체를 그리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디자이너와 차별화되는 뭔가 뾰족한 기술을 하나 갈고닦고 싶었는데,
어릴 때부터 최첨단 기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두 번째 이유,
멋있단 얘길 듣고 싶어서.
5년 반 정도 아동물을 했다. 전 직장이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대형 영어학원이었고, 중학교 1, 2학년 정도부터 초등학생, 나중에는
유아를 대상으로 한 작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성인물(?)을 너무 하고 싶었다.
아동물은 아무리 잘해도 멋있단 말을 듣기 쉽지 않다. 잘하면 귀엽단 말,
아기자기하다는 말 정도 들을 수 있는 것 같다. 그 말이 싫거나 아동물 하는 것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속으론 나도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 잘할 수 있고,
멋있는 작업도 잘할 수 있는데란 생각을 품고 일을 했던 것 같다.
(결국 이번에 텀블벅하면서 소원성취했다. ㅎㅎㅎ)
세 번째 이유,
오래 사랑받는 작업을 하고 싶어서.
전 직장이 학원이다 보니 리플릿이나 전단, 이벤트 포스터 같은 것들을
많이 만들었다. 한번 쓰고 버리는 작업들을 많이 하다 보니 오래 남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픽의 유행 주기는 빠르다. 불과 1, 2년 전에 작업했던 것이
지금 보면 촌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런 것과 무관한, 10년이 지나도
빛바라지 않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만큼 오랜 시간
작업 해야한다는 걸 여실히 느끼는 중..)
그리고 긴 호흡을 쓰는 작업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학원에서 수업교재를 만들 때는 주간 마감으로 일을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급하게
마무리 지어서 아쉬울 때가 많았다. 그냥 최악만 내보내지 않는 정도라고 할까.
그래서 오랜 시간 정성 들여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그래서 힘들구나..
해 본 적이 없어서.)
하나 더,
서체를 그리면 그래픽 디자인을 할 때와 다른 만족감이 있다.
그래픽 디자인을 하다 보면 이따금 회의 감이 드는 때가 있는데, 정작 내가 한 부분이
별로 없다고 느껴질 때나 디자인하기에 좋은 재료(글, 사진, 그림)가 들어오지
않을 때 회의감이 들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비롯해 여러 군데 다니긴 했지만 주로 규모가 작은 회사를 다녔고,
항상 의뢰인은 좋은 글과 사진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좋은 디자인 작업이 나오기 어려운 때가 많았다.
(주변을 보면 디자이너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사실 그래픽 디자인은 좋은 글과 사진·그림을 보기 좋게 짜깁기하는 것에 가깝고,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마치 요리사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부족하거나 신선하지 못한 재료로는 훌륭한 요리를 만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하튼 글작가나 사진작가, 그림작가, 기획자 등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좋은 작업을 하기 어려운 게 그래픽 디자인이다.
서체를 그리는 일은 조금 더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작업,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혼자 작업했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작업이어서 꾸준히 했던 것 같다.
+ 내가 그린 서체를 다른 디자이너가 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내가 재료를 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처음'으로 작업한 것도 보고 싶다.
결론
글을 길게 썼지만, 요약하자면
결국 야망 + 허영심으로 그리는 거였다.
내가 그럼 그렇지..
난 그냥 내 욕심 채우려고 사는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