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몰랐다.
<처음> 서체를 발송하는 날까지 수정을 하게 될 줄은.
(역시나 문장부호 수정인데 문장부호에 관한 글은 따로 정리해두려 한다.)
수정 후 검토는 다른 분(정근호 님)이 도와주셨다.
마지막이라고는 하지만 끝난 것 같지 않다.
(사실 얼마 전 이용제 선생님께
올해 말에 수정 작업에 들어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지금 느끼는 마음은 약간의 홀가분함과 부채감,
찜찜함. 서체를 그리다 보면 하루하루 보는 눈이 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어제 그린 글자도 오늘 보면 이상하다.
<처음>을 그리면서 배운 점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었다.
부족해 보여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래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래서 날마다 마음을 비웠다.
수정하고 싶은 점을 (잊어버릴 것 같으니 적어 놓기로 한다.)
적어두면 우선 영문 커닝. 정말 엉망이다. 어려워서 마지막까지 미뤘고,
그래서 후회했다. 어렵다고 미루면 안 되는 거였다. 못하는 것도 하다 보면 늘기에
빨리 시작하고 고쳤다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같다. <처음>은 세로쓰기 글자라
가로와 세로 영문 커닝을 각각 해야 했는데, 세로 커닝을 끝내고 가로 커닝을 하게 됐을 때 깨달았다.
세로 커닝이 미숙하다는 것을. (물론 가로 커닝이라고 잘한 건 아니지만.)
왠지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영문 커닝 작업도 며칠은 해야 하는
작업이라 포기하기로 했다. 이미 마감을 일주일 미룬 터라 계속 미루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글자를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일 것 같은 건, 글자 코 모양이 다른 것.
획 그리는 것도 점점 늘다 보니 다시 그리고 싶었지만 역시나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그것만 붙잡고 작업해도 최소 몇 주는 걸릴 것 같았다. 그리고 획 모양보다 중요한 건
글줄을 맞추는 일이었기에 대를 위해 소를 포기하기로 했다. (한 번 포기했는데, 두 번 못할 것도 없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몇몇 글자는 모양을 바꿔봤다. 결국 글자 모양이 이도저도 아니게 다 섞이게 됐다.
사실 코 모양만 다른 건 아니다. 속줄기 모양도 조금씩 다르다. (어떻게 보면 이게 더 심각하다..)
속줄기가 어디에 들어가야 하는지에 따라 모양이 달라져야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처음>은 예전에
그린 속줄기와 비교적 최근에 그린 속줄기의 모양이 많이 다르다.
이유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는 실력이 살짝 늘어서인 것 같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그때도 알고 있었다면, 지금 볼 수 있는 그때도 볼 수 있었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걸 그 때도 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세히 보면 코 모양이 조금씩 다 다르다. 속줄기 모양도 다른데 예시 그림은 양호한 편이다. 마지막으로 고백하자면, 글자 크기와 모양. 쌍닿자랑 받침 두 개 있는 글자는 크기도
모양도 엉망이다. 보통 쌍닿자인 글자들은 크기가 크거나 반대로 너무 작고,
받침 두 개인 글자는 찌그러졌다. 이 부분이 가장 큰 문제라 언젠가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글을 써놓고 나니 이렇게 완성도 떨어지는 글자를 무슨 배짱으로 세상에 내놓는 거지 싶다.
(하지만 후원자들에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처음이니까 조금 아니 많이 부족해도 너그럽게 봐주세요."
- 서체 이름이 '처음'인 이유는 사실 여기 있다.)
괴롭지만 과거에도 볼품없는 디자인을 무수히 했고, 마감을 하며 조금씩 실력을 쌓았다.
부족한 디자인이라도 마감을 하지 않으면, 최종 입고를 하지 않으면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한마디로 마무리 짓지 않으면 성장도 없다는 얘기다. 사실 어려운 작업(초짜인 나는 본문용 서체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어려운 작업인 지 몰라서 무턱대고 덤볐다고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결과와 상관없이.
한 가지 더 배운 점은 서체 디자인은 꾸준함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란 걸 알게 됐다.
며칠, 몇 개월 열심히 했다고 좋은 작업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지치지 않고 꾸준히, 아니
지쳤더라도 그냥 하는 게 활자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끝으로 <처음>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도와주신 이용제 선생님과
후반 제너레이트 작업과 검수를 도와준 분들(김민기, 김모은, 조재훈, 정근호)께
감사드린다. 문장부호 수정이 많았고, 오류도 많이 발생해서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리고 후원해 주신 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추신 - 글을 마치며, 마지막 영광을 오랜 시간 함께 해주 '뉴진스'에게 바친다!
편하고 물리지 않는 노래로 <처음>을 작업하는 동안 내 곁을 가장 오랜 시간 지켜주었다.
사랑해요, 뉴진스!